고(故) 신현정 목사님을 추모하며 (1939–2026)

고(故) 신현정 목사님

한인사회복지회 창립 사무총장이셨던 신현정 목사님께서 2026년 5월 29일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목사님을 애도하며 마음이 숙연해졌다. 복지회와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이 통합하여 출범한 하나센터의 다내 코백 사무총장 역시 장례식이 끝난 후 소식을 들었고, 목사님의 약력이 담긴 예배 주보를 보내주었다. 그날 저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며 목사님의 떠나심은 다른 지역사회 지인이나 리더들의 별세와는 다르게 다가왔다. 내게 지역사회 활동가로서의 길을 이끌어 주신 분이 바로 목사님이셨기 때문이다. 목사님의 지도 아래 복지회의 모든 직원들은 전공이나 맡은 직책에 상관없이, “사람을 돕자, 특히 한인 이민자를 돕자”는 단 하나의 사명을 품은 심정상의 지역사회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우리는 그분을 사회사업 기관의 최고 행정 책임자를 칭하는 옛날식 직함이었던 “총무님”이라 불렀고, 안수를 받으신 후에는 자연스레 “목사님”이라 불렀다. 

목사님은 1세 이민자들 중에서 독보적인 분이셨다. 대다수 한인 단체가 ‘코리안’이라는 명칭만을 사용할 때, 목사님은 선구적으로 복지회 창설부터 단체명에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단어를 채택하셨다. 이민자는 정착국에 적응하는 동시에 모국의 유산을 존중해야 하므로 우리의 새로운 삶은 두 개의 중심을 가져야 한다고 확신하셨다. 복지회는 <한인사회봉사회>로 시작하여 나중에 한국어 이름이 바뀌었으나, 영어명은 창설부터 통합까지 변함이 없었다. 더 나아가 목사님은 지역사회 단체를 설립하고 그 역량을 확장하는 미국식 접근법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이해하고 계셨다. 일부 한인 지도자들이 감투에 연연할 때, 목사님은 프로그램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고 정부 기관과 민간 재단으로부터 지원금을 확보하기 위해 부지런히 기획서를 작성하는 데 집중하셨다. 

목사님의 지휘 아래 복지회는 조용히 조직의 역량을 키워나갔고, 한인 거주 밀집 지역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세 번이나 사무실을 이전하고 부속 사무소를 열었다. 1972년, 단 한 명의 파트타임 직원(본인)으로 시작했던 복지회는 1980년대에 이르러 연간 예산 100만 달러가 넘고 직원이 50명에 이르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KBS 교향악단의 협연이나 한국 여자배구 국가대표팀의 친선 경기 같은 대형 커뮤니티 행사들도 모두 복지회가 주관했다. 당시에는 이런 대규모 행사를 기획하고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춘 한인 단체가 복지회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사들이 약간의 수익을 내기도 했지만, 목사님은 고된 미국 생활 속에서 위로를 찾고자 하는 한인 이민자들에게 문화 및 여가 경험을 선사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두셨다. 

나는 목사님만큼 영어로 글을 쉽고 정확하게 쓰는 한인 1세를 아직 보지 못했다. 미국에서의 대학원 과정과 맥코믹 신학교에서 받은 박사 학위가 그분의 뛰어난 글쓰기 실력에 어느 정도 기여했겠지만, 한국에 계실 때부터 영어 글쓰기에 능숙해지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셨음에 틀림없다. 컴퓨터 시대 이전에 교육을 받은 구식 스타일이었던 목사님은 항상 연필과 네모난 지우개를 사용해 글을 쓰셨는데, 그 모습에서 대단한 집중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삶의 후반부에 목사님은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 같은 소셜 미디어를 매우 잘 다루셨다. 내가 목사님보다 디지털 도구를 다루는 데 훨씬 서툴렀던 탓에 목사님의 메시지에 충분히 답장해 드리지 못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목사님의 업적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한인 이민이 정점에 달했던 시절 매년 수백 명의 한인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찾았고, 미국 시민권 신청, 영주권 신분 조정, 한국에 있는 가족 초청 등에 대한 지원을 받았다. 연장자들은 공공 혜택 신청과 노인 주택 입주 지원을 받았으며, 노인 프로그램을 통해 취업 기회도 얻었다. 그리고 한인2세 아이들은 유아원에 등록할 수 있었다. 단체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도 목사님은 4300 노스 캘리포니아에 있는 현 하나센터 본부 건물을 매입하셨고, 1980년대에는 무궁 테라스와 코람 연장자 아파트를 기획하고 건립하셨다. 이처럼 시카고 한인사회에서 건립한 노인 주택 개발은 미국 전체에서 최초였기에, 다른 도시의 한인사회에서도 자신들의 주택 개발을 위해 목사님께 조언을 구했다. 

복지회의 사명은 처음부터 명확했다. 새로 도착하는 한인 이민자들의 정착을 돕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인 단체들이 한인사회에만 몰두하고 있던 시절, 목사님은 이례적으로 비한인 이사들을 위촉하고 비한인 클라이언트들을 돕는 데에도 마음을 열어두셨다. 백인 목사와 변호사들을 이사회에 청빙하여 복지회를 미국 주류 사회 및 전문 지식과 연결하셨다. 또한 한인 상인들을 지원하며 한흑 갈등을 중재할 때는 시카고 어반 리그와 시카고 해비타트의 흑인 지도자 두 명을 복지회 이사로 위촉하기도 하셨다. 

목사님이 졸업하신 사회사업대학원의 이름이기도 한 제인 애담스의 정신에 걸맞게, 목사님은 복지회의 문을 다인종 정착 서비스로 개방하셨다.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된 후, 복지회는 1980년대 초반까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온 동남아시아 난민들의 거점이 되어 이들이 일자리를 찾고 공공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당시의 일부 직원들은 훗날 자신들의 지역사회 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다. 알바니팍 지역에 라티노 인구가 증가하자 그들의 자녀들이 복지회 유아원에 등록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들 라티노 가족들은 모든 연령대에 걸쳐 주요 클라이언트 층이 되었다. 1986년 레이건 대통령의 이민 사면 조치에 따라 한인뿐 아니라 수많은 인도계 가족들이 복지회를 찾아와 사면을 신청하고 이어서 미국 시민권을 신청했을 때, 복지회는 농담 삼아 '인도 영사관'으로 불리기도 했다. 목사님이 한인 전통주의자로 남기를 내려놓고, 변화하는 환경과 함께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면 이 모든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류사회로 나아가는 핵심적인 다리 역할을 했던 목사님은 시카고 유나이티드 웨이의 이사와 시카고 노회의 여러 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셨다. 목사님의 이러한 참여와 활동은 복지회와 다른 한인 단체들이 견고한 조직 구조를 갖추고 주요 지원금을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목사로서 지역 정치의 번거롭고 세세한 속성에 다소 불편함을 느끼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무총장으로서 노인 주택 건립을 위한 시청 소유 부지를 확보하고 예산 및 행정적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지역 시의원들과 자주 협력하셔야 했다. 목사님과의 공조 속에서 이 시의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인 이민자들을 위해 자신들의 지역구 안에 있는 공장 일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목사님은 대학원에 지원할 때 추천서를 써주셨다. 결혼식에도 오셨고, 양친의 장례예배에도 모두 참석하셨다. 목사님은 나의 부족함에 대해 항상 관대하셨고, 기회가 될 때마다 격려해 주셨다. 경험이 미천한 사람을 직업 개발, 연구 보조, 커뮤니티 조직 담당이라는 각기 다른 세 가지 역할로 채용해 주시며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셨다. 굳이 데려가지 않아도 될 중요한 회의에 동석시켜, 한인 사회를 넘어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도록 지평을 넓혀주셨다. 외부 일정이 점심시간으로 이어지면 설렁탕이나 짬뽕을 사주셨는데, 젊은이에게 그 음식들은 정말 맛있었다. 대학을 막 마치고 저축해 둔 돈도 없어 차가 없던 시절에는, 기관의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당신의 차를 선뜻 내주시곤 했다. 

1972년부터 1995년까지 그 많은 것들을 일궈내셨음에도, 목사님은 결코 자신의 업적에 연연하지 않고 담담히 앞으로 나아가셨다. 이러한 집착 없는 삶을 실천하기 위해 목사님은 전임 목사가 이전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일정 물리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장로교의 규칙을 인용하시며, 내려놓는 삶을 몸소 실천하셨다. 복지회에서 은퇴하신 후 목사님은 중서부 한미노회의 창립 총무로 봉직하며 아무도 가보지 않은 또 다른 길을 가셨다. 목사님께는 사회복음(social gospel)보다는 본연의 복음 영역에서 사역하는 것이 어쩌면 더 잘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노회에서 하신 사역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평생 사회복지사로 살아오신 목사님은 '사회복음 역시 복음이며, 그것은 단지 복음의 특정한 표현일 뿐'이라는 점을 늘 재확인하셨을 것이다. 

신 목사님의 스승이신 장공 김재준 목사님(1901–1987)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복지회를 방문했을 때 제자였던 신현정 군이 사무실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며 단체를 성장시켜 나가는 모습에 얼마나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를 기록하신 바 있다. 이제 목사님은 스승이신 김재준 목사님과 두 분의 공통된 스승께 이렇게 보고하실 수 있을 것이다. "가르쳐 주신 대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고 왔습니다.’" 

신 목사님, 부디 안녕히 가세요, 많이 보고 싶을 것이에요. 목사님 밑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제게 큰 기쁨이자 특권이었어요. 

최인철 (한인사회복지회 전 사무총장, 신 목사님 밑에서 도합 7년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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